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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유디렉과 내가 같이 토끼바에서 일하던 시절 그러니까 2013년 초여름인가 초가을인가 두분이 처음 오셨던걸로 기억한다. 아니 아마도 두세번째 방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두분을 알아보고 인식하기 시작한건 중년의 남성 두분이 주중 비슷한 요일에 비슷한 시간 한가한 토끼바에 들어와 어김없이 올드파를 주문하였기 때문이다. 중년의 남자 둘, 올드파라는 위스키. 당시 토끼바에서 위스키를 주문 받는 일이 흔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평범하지 않은 손님들을 기억할 수 밖에 없었고 젠틀한 두 중년남자 손님의 젠틀한 음주습관과 우정을 남몰래 흠모하며 '올드파 손님'이라는 별칭을 붙여 불러왔다. 그 후 3년 동안 올드파 손님은 한결 같이 한달에 두어번씩 찾아오셨다. 한번도 올드파 외에 다른 술을 찾은 적이 없고,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늘 두분이서 유쾌하게 술을 즐기셨고,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주문 외에는 거의 없으셨다. 지난 3년간 나눈 대화 역시 거의 없었는데, 실내흡연이 금지 되었을 때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시던 두분 앞을 지나다가 가볍게 웃으며 일종의 신세 한탄을 했던 것과 (당시에는 나도 흡연 중이었기에), 아르바이트를 많이 고용하고 가게에 자주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 오랜만에 뵈었을 때, 요즘엔 잘 안 보이시데요? 라고 몇마디 나누었던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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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올드파가 일시 품절 되었던 적이 있다. 올드파손님들이 지난 3년간 처음으로 토끼바에서 올드파가 없어 난감해 하며 다른 술을 시킨 날이 되었다. 여느때 같았으면 두분이서 사이좋게 한병 비우시고 기분 좋게 일어나셨을테지만, 그 날은 다 비워지지 못한 봄베이가 킵 되었다. 어제 올드파 손님이 오셨다. 가게정리 날짜가 정해져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하나 하고 있었는데, 주문을 다 하시곤 (역시나 올드파 한병에 바닥이) '25일 까지만 하신다면서요?' 라고 물으셨다. 어찌 아셨는지 당황했고 인터넷 어디에선가 보셨다길래 겸연쩍어하며 답을 드렸다. 돌아와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눈이 뜨거워졌다. 두분과 토끼바에서의 마지막일 대화도 있었다. '여기 없어지면 이제 우리는 어디 가야해요? 허허허 괜찮은 곳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며 웃었다. 그리고 계산을 하고 나가시며 '그동안 고마웠어요 어디에선가 비슷한거 또 하게 되면 볼 수도 있겠죠' 하고 두분은 토끼바에서 나가셨다. 토끼바가 흠모하고 존경했던 멋진 중년 올드파 손님 아름답게 퇴장.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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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바 #연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