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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마조히스트다 : <카오스>





술을 아주 못 마시는 친구가 있었다.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마치 멕시코산 고추를 한 주먹 씹은 것처럼 불타오르는 친구였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다. 회사생활 6개월, 신입사원인 친구는 거침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 그가 말하길, 잦은 회식으로 ‘이게 다 술에 내성이 생겨서’란다.

<카오스>를 보고 나오는데, 그 친구가 떠올랐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는
아마도 영화 속 반전에 지독한 내성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가 독점하고 있던 반전이 언제부터인가 모든 장르,
심지어 코미디에까지 등장하게 됐고, 관객들은 슈퍼 반전내성을 갖게 됐다.
이제는 말 그대로 ‘웬만해선 그들을 놀래 킬 수 없다’.

이런 반전의 카오스 상황에 <카오스>는 배짱을 건 관객과의 두뇌싸움을 선택했다.
새로운 시도도 아니었고, 성공한 사례도 거의 없었지만, <카오스>는 호기 있게 도전장을 던졌다.
대놓고,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을 펼쳐 보일 테니 어디 한번 맞춰보라고 결투를 신청했다.
영화제목도 스포일러성으로 짓고, 친절하게 주인공의 입을 통해
‘카오스이론’을 설명해주며 관객에게 차포까지 다 떼 줬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카오스>가 외쳤다.

그런데 관객이 슬그머니 일어선다.

“재미없다. 안 할래.”

<카오스>는 나름대로 잘 계산된 반전을 가지고 있었다.
차포까지 뗐지만 관객이 이기기는 힘들었다.
제작진의 예상대로라면 반전게임에서 진 관객은 ‘와 이렇게 질 줄이야!’고 소리치며 흥분해야했다.
그런데 실제론 관객 대부분이 시작도 전에 게임을 포기하거나,
도중에 어서 게임이 끝나기만을 지루하게 기다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반전게임에서 관객은 지독한 마조히스트다.
어떤 관객도 반전게임에서 이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반대로 영화가 자신을 처절하게 이겨주기를 바란다.
시작과 동시에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주먹을 날리고,
정신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관객을 순식간에 코너로 몰아서 넉 다운 시키길 바라는 것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건, 헐떡거리며 링에 드러누웠을 때 느껴지는 전율이다.
<카오스>는 그 점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관객을 사디스트로 착각했다.
시작부터 공격을 유도하려고 지는 척하더니 12라운드 내내 경기를 지루하게 끌며
계속 ‘어디 한번 쳐봐. 날 이길 수 있겠어?’라며 실실거렸다.
이미 3라운드가 지나기도 전에 관객은 ‘내가 진 걸로 하고, 그냥 빨리 끝내자.’라고
마음속으로 수백 번은 외쳤는데 말이다.